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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블라인드 달아주세요 

딸이 11월에 우리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간 여러 가지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왔다. 전세 아파트를 구하고 혼수용품을 하나씩 들여와서 제자리에 배치했다. 침대와 소파가 가장 먼저 들어와서 안방과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가전제품이 줄줄이 들어와 자기자리를 차지했다. 냉장고는 부엌공간에, 세탁기는 베란다에, TV는 거실에, 가스렌지는 주방을 차지했다.

토요일 아침에 딸아이가 일어나자마자 자기가 이사할 집 블라인드를 좀 달아달라고 한다. 며칠 전 주문한 블라인드가 도착해서 달아보고 싶단다. 달아 놓으면 어떨지 빨리 보고 싶다고 나를 조른다. 사위를 부르라고 했더니, 지금 자야 하니 안 된단다. 어제 저녁에 후배를 만나 늦게까지 술 먹었다고 한다. 아빠가 피곤한 건 안중에도 없으면서, 벌써부터 신랑 챙기기에 바쁜 모양새에 살짝 서운함이 든다. 나도 내심은 직접해주고 싶어서 못이기는 척 전동공구를 챙겨 집을 나섰다.

딸과 함께 사이좋게 블라인드 설치 작업 중 @ 여의봉

먼저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제작된 거실 블라인드부터 작업을 했다. 국내에서 제작된 우드제품으로 짙은 색상을 띠고 있었다. 딸의 도움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나의 목표는 작업이 마무리 될 때까지 우리가 다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작하려고 보니 펜이 없다. 딸이 아이펜슬을 가져다주어서 사용해 보았다. 심이 물러서 한번 사용하고 나니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화가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잘 견뎌내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어 주변의 물건을 이용하여 일정한 거리 측정을 했다. 눈대중을 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블라인드 소켓을 천정에 고정시켰다. 블라인드 하나에 두 개의 소켓을 사용하도록 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블라인드를 모두 달아놓고 보니 제법 아늑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작은방 긴 블라인드 설치를 위해서 준비중 @ 여의봉

딸의 도움으로 거실 블라인드를 모두 부착하고 나니, 작은방 두 개에도 해 달라고 한다. 비지땀이 흐르지만 딸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 기분 끝까지 유지하는 거야. 언제 나타나서 우리의 평화를 깨어지게 할 화란 놈을 잘 다스리며 작업을 했다. 서재와 옷방에는 매우 긴 블라인드라 전체 4개의 소켓을 달고 블라인드를 장착했다. 눈대중으로 했지만 일직선이 되어 잘 부착되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갑자기 야단이다. 서재 블라인드가 주문한 길이보다 짧아서 완전히 가려지지 않고 아래쪽이 약간 짧았다. 사위가 주문한 옷방 블라인드는 치수가 정확하게 맞는데, 자기가 주문한 것이 사이즈가 맞지 않아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 평소 약간 덤벙되는 습관이 있는데, 남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모양이다. 약간 짜증이 올라왔지만 서로에게 잘 해주고 싶은 맘이라고 생각하니 그놈의 화도 주춤거렸다. 작업이 마무리 될 때까지 우리의 평화는 잘 유지되었다.

블라인드 작업이 마무리 된 거실 모습 @ 여의봉

딸의 신혼집을 꾸미기는 일을 하면서 옛날 우리 신혼 때를 떠올려 본다. 그때 비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 당시 방 두개 작은 부엌공간만 있으면 최고의 신혼집이었다. 전세 삼백만원에 첫 신혼방을 꾸리고, 그곳에서 딸을 낳았다. 그 딸이 살림을 시작하는 지금은, 1억이 넘는 전세금에 천만원이 넘는 살림살이가 필요하다. 지금 아이들은 시작이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물론 시대가 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물욕에 많이 물든 것 같다.

우리나라 관혼상제에 허례허식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평소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 결혼에는 소박함을 꿈꾸었는데,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 같다. 아이가 많은 빚을 안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걸 보니 마음이 참 답답하다. 사회를 바꾸는 힘은 교육에서 나오고, 교육은 가정교육에서부터 시작이다. 정신보다는 물질을 더 탐하는 모습에서 나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삶으로 가르치고 삶으로 배우자고 대안교육을 하고 있는데, 참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 딸과 사위가 오순도순 행복한 가정을 가꾸어 나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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